당신께 맞춥니다, 안성시 국회의원 김학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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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을 빛낸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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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투안 공베르 사진 명품 안성포도의 전래자 앙투안 공베르(Antonio Gombert, 세례명: Antonio, 한국명: 孔安國) 선생의 초상.

1900년 부임한 후 30년 넘게 사목했던 안성성당을 떠나 서울의 용산신학교로 자리를 옮길 무렵인 1930년대 초반 촬영한 공베르의 사진이다. 공베르 신부가 소개하여 대표적인 안성의 특산 브랜드가 된 안성포도는 현재 안성에서 581ha에 걸쳐 700여 농가가 재배하고 있으며, 연간 생산량도 8,134톤(2007년 기준)에 이르러 질과 양, 맛과 선호도에서 전국 수위를 자랑한다.

지역 유수의 농업 생산물로 자리매김한 안성 명품포도는 지금으로부터 108년 전 안성에 첫 발을 디딘 프랑스 신부가 선교의 방편으로 보급한 까닭에 각별한 종교적 의미까지 더해지면서 안성을 대표하는 명품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는 바, 사진에 보이는 앙투안 공베르 신부가 바로 그 전래자이다.

먼저, 안성포도의 전래자인 공베르 선생의 개략적인 연대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875. 4. 27 프랑스 아베롱 현 호데즈(Rodez) 시 캄블라제 마을에서 출생.

1897. 9. 16 프랑스 파리 뤼뒤박 소재 파리외방전교회 입회.

1900. 6. 24 형 앙투안 공베르, 동생 쥘리앙 공베르와 함께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에서 사제로 서품 받음.

1900. 8.1 앙투안과 쥘리앙 두 형제, 미지의 땅인 조선에서의 선교활동을 결심하고 조선을 향해 출발.

1900. 9.10 당시 안성을 관할했던 드비즈 신부, 안성본당 설립 필요성 서울대교구에 보고

1900. 10. 9 앙투안 공베르, 쥘리앙 공베르, 부산을 통해 서울 도착

1900. 10.19 앙투안 공베르, 안성 도착

1900. 10-1901. 4 앙투안 공베르 안성성당 주임신부 취임

1909. 1. 15 안법학교 설립

1922. 10. 4 성당(구 본당, 일명 구포동성당) 봉헌

1929 동아일보사 교육공로상 수상

1932.9 서울 용산신학교로 이임.

1950. 6. 25 공베르 신부의 금경축(金慶祝)

1950. 7. 15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에 의해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

1950. 11. 12 평안북도 중강진 선종


젊은 공베르와 조선 선교의 미션
한국진출당시 공베르 사진 25살

동생 쥘리앙 공베르 사진
<사진 1,2>는 약관의 20대 중반인 앙투안과 쥘리앙 공베르 두 형제가 사제로 서품을 받고 난 후 기념촬영한 사진이다.

같은 시기에 신부 서품을 받은 신학교 동기생들이 파리 시내 뤼뒤박(rue du bac)에 자리한 파리외방전교회(L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의 고풍스러운 건물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사진인데, 뒷쪽에 조선 선교를 자원하여 안성과 길고 질긴 인연을 맺게된 청년 앙투안 공베르의 모습(화살표)도 보인다.



<사진 1,2 >은 조선 선교의 사명을 안고 조선으로 출발하기 직전의 앙투안 공베르는 같은 신학교에서 동시에 사제 서품을 받고 형 앙투안과 함께 조선 선교에 동참한 동생 쥘리앙 공베르(Julien Gombert, 한국명 孔安世, 1877~1950)


공베르가 안성에 도착했을 무렵
비봉산과 안성향교 사진 선교사 공베르가 안성을 찾았던 1900년대 초반 무렵의 비봉산과 안성향교의 모습이다.

젊은 공베르 신부가 동생과 함께 조선에서의 선교를 위해 우리나라를 찾았을 무렵, 이웃한 죽산군(당시 안성과 죽산은 서로 다른 별개의 지역이었다)에서만도 병인년의 교난(敎難)을 맞아 천주교인들이 24명이나 처형을 당했을 정도로 서학(西學)에 대한 배척의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뒤이어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1886년)됨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의 선교자유가 폭넓게 허용되었지만, 여전히 천주교가 일반민중 속으로 파고들기는 지난한 일이었다.

제주의 일반민중과 천주교인 등 900여 명이 사망한 신축교난(辛丑敎難, 이재수의 난)이 공베르 형제가 조선에 도착할 무렵 발발하는 등 향리에서는 여전히 외래종교를 거부하고 적대시하기까지 했다.

천주에 대한 독실한 신앙으로 사제가 되고, 낯선 이국에서 선교를 하겠다는 불타는 소명감을 품고 조선과 안성을 찾았지만, 언어와 관습의 장벽, 주변의 달가워하지 않는 눈길, 음식과 환경의 차이 등 숱한 난관들이 젊은 공베르를 괴롭혔다. 그래서 그는 안성에 정착한 초기 “오랫동안 안성의 주인이었던 악마는 ‘불청객’인 나를 쫓아내려 한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가 말한 ‘악마’는 사진에 보이는 향교로 대표되는 우리의 전통신앙을 일컫는 비유적 표현일 게 분명하다. 낯선 안성에 도착한 직후 이방의 젊은 선교사가 감당해야 했던 외로움과 두려움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이러한 역경을 극복한 공베르는 사진의 우측 끝부분(시각형 표시 부분)에 위치한 한 민가를 매입한 후 이를 개조하여 성당으로 이용하였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당시에는 이 일대가 건물 하나 없이 온통 논밭만이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허허벌판이었다. 뒤로 보이는 산은 비봉산이다. 비봉산은 승천하는 용이 용틀임하거나 비상하는 봉황이 날개짓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예로부터 안성사람들이 신성한 영산(靈山)으로 여겨왔다. 고래로 안성사람들의 문화적 역사적 삶의 중심을 이루었던 이 산을 지칭한 이름만도 ‘비룡산(飛龍山),’ ‘구위산(九山),’ ‘구백산(九白山),’ ‘백봉(白峯)’등 10여 가지에 이른다.


공베르와 안성3.1만세운동
공베르와 안성3.1만세운동 안성에 정착한 지 수년 동안 갖은 역경 속에서도 공베르는 한국어를 배우는 한편, 신품종 포도나 감자의 재배법과 양잠기술 등 서구의 새로운 농법을 소개 장려하고, 안법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에 헌신하는 등 지역민들과 동화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다. 또한 전국 3대 실력항쟁의 하나로 평가받는 안성31만세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등 나라 잃은 한국민과 안성사람들의 저항을 적극적으로 도움으로써 안성사람들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위의 사진은 1919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것으로 안성31만세운동 주모자들에 대한 재판 장면이고, 아래는 이 사진과 함께 수록된 관련기사이다. 정확히 89년 전에 촬영된 사진의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나, 자세히 보면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장면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다. 피고인들은 모두 다 일정기의 안성사람들로, 원곡과 양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안성만세항쟁 때 체포된 선열들의 모습이고 재판을 받고 있는 장소는 경성고등법원 법정이다. 31운동 당시 안성은 어느 지역보다도 더 가열차게 만세운동을 전개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베르 신부는 일경에 쫓겨 성당으로 피신한 안성사람들을 치외법권 구역임을 강하게 주장하여 보호하는 등 31만세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하기도 하였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안성사람들의 항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기미년 만세운동의 불길이 차츰 사그러들 무렵 새롭게 불씨를 지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3월 말부터 시작된 안성의 항쟁은 읍내면(안성시내), 이죽면(죽산면), 양성면, 원곡면 등 안성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들은 양성면 일경주재소를 불지르고 면사무소·우편소와 같은 식민통치기관들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항쟁운동을 전개하여 현장에서 순국한 사람이 3명, 안성경찰서에서 고문으로 순국한 사람이 5명,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사람이 9명, 부상 후 순국한 사람이 7명이고 옥고를 치른 이가 127명에 훈계방면자를 제외한 피검자가 361명에 달했다.


1920년대 초반 무렵의 안성장터 모습
1920년대 초반 무렵의 안성장터 사진 조선후기 이래 크게 명성을 떨쳤던 안성장터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으로, 조선후기 고지도에 보이는 장기(場基)의 실경 모습이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로 공베르가 안성 땅을 밟기 직전, 당시 안성을 관할했던 아산 공세리 성당의 드비즈(Emilius Devise) 신부가 천주교조선대교구에 본당의 터전으로 다른 지역이 아닌 안성읍내를 천거한 것도 조선후기 전국 3대 장시로 꼽혔던 유수한 장기(場基)를 끼고 있기 때문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장기’는 전통사회에서 각 지역마다 장이 섰던 곳을 일컫는 일반명칭이다. 이곳의 당시 지명은 ‘안성군 읍내면 장기리’였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창전동과 성남동 일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창전동과 성남동 일대에 넓게 형성된 안성장기의 여러 골목 중에서 특히 사진에 보이는 곳을 ‘싸전거리’라 불렀는데, 삼남의 질좋은 곡물들이 이곳을 거쳐 전국각지로 유통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안성의 문화와 역사를 함축하는 말로 통용되는 ‘안성맞춤’이나 ‘도구머리 트집잡기’, ‘이틀 일해 안성장에 팔도화물 벌 열’ 같은 성구(成句)들은 모두 다 이 장터를 배경으로 하여 생겨나 널리 퍼진 말들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과 물산이 집결하는 중심지인 서울보다 선보인 품목이 둘이나 더 많았다고 한 옛 명성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진이다. 그 명성을 웅변으로 말해주듯, 입추의 여지없이 장꾼들로 가득 들어찬 안성장터의 모습에서 아득한 시간의 간극을 사이에 둔 옛 안성사람들의 삶과 일상이 마치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와 닿는 것만 같다.


안성성당 구관
안성성당 구관 사진 초창기 민가를 구입 개조하여 학교와 성당으로 사용한 공베르 신부는 1922년 마침내 로마네스크 양식의 새로운 성당을 신축 봉헌하여 경기 남부 지역의 천주교 선교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하게 된다. ‘구포동성당’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 건축물의 설계 및 감독은 빅토르 푸아넬(Victor Poisnel) 신부가 맡았으며, 여기에 쓰인 기와와 돌, 그리고 목재의 일부는 현재의 안성시 보개면 동안리에 있던 누각식 서원인 동안강당(東安講堂)을 헐어서 썼고, 나머지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해 온 것이었다. <사진 9>와 <사진 10>의 ④에 보이는 성당이 바로 그것인데, 한국 근대 역사와 건축사에 끼친 영향과 의미를 새겨 경기도는 1985년 기념물(제82호)로 지정한 바 있다.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원래의 모습이며, 한국전쟁 이후인 1953-55년 현재의 종탑 및 종루를 증축(<사진 11> 참조)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사진 10>에 보이는 세장의 옛 사진들은 같은 장소를 동일한 방향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촬영한 사진들이다. ①②③⑤⑥은 모두 안성성당 부속사들로 당시의 안법학교, 사제관, 수녀원 등으로 사용된 건축물들이다. 안법학교가 설립된 시점은 1909년이지만 1950년대 초반 이전까지는 안성성당에 딸린 부속건물을 교실로 이용하였다. 세 장의 옛 사진 우측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구포동성당이다. 위의 2장은 한국전쟁 이전에 촬영한 사진들로 성당에 종탑과 종루가 없는 반면, 세 번째 사진에는 1950년대 중반 증축한 종탑이 당당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맨 아래의 사진은 비교를 위해 최근 같은 장소를 촬영한 사진이다.


안성포도와 삼덕포도원
안성포도와 삼덕포도원 사진 앙투안 공베르는 1900년 안성에 정착한 이래 1932년 안성을 떠날 때까지 수차에 걸쳐 고국인 프랑스를 방문하였는데, 갈 때마다 그는 프랑스 남부의 유서깊은 포도산지들에 들러서 한국에서 잘 자랄 수 있는 포도나무 종자를 구해왔다.

이렇게 가져온 묘목이나 씨앗을 처음에는 안성성당의 마당에, 나중에는 성당 부속 토지에 제법 규모를 갖추어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유명한 삼덕포도원이 되었다. <사진:삼덕포도원_3>의 화살표 부분이 당시의 삼덕포도원 자리인데 개발에 밀려 현재는 이곳에 동신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공베르는 단순히 포도를 재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를 포도주로 만들어 자신이 집전한 전례(典禮)와 미사에서도 직접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병 해충에 취약하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로 포도주로 만들었을 때 색이 붉고 진하며 향기도 그윽한 뮈스카(muscat)나 뮈스카 드 앙브르(muscat de hambourg)같은 품종들을 주로 들여왔으며, 동생인 쥘리앙이 안성을 찾아왔을 때 손수 만든 포도주를 대접했다는 일기의 기록, 그리고 현재 프랑스에서 포도주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후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할 때 공베르 신부가 안성에서 포도를 재배한 주된 이유가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사진:공베르 신부_1>은 1920년대 안성성당 앞 뜰에서 자신이 기른 포도 한 송이를 손에 들고 포즈를 취한 공베르 신부의 모습이며, <사진:안성에서 생산된 포도_2>는 현재 안성에서 생산된 포도의 사진이다. <사진:공안국 귀국_3>는 수차에 걸친 고국 방문 중 1926년의 방문 후 선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후 기차를 이용하여 안성역에 도착한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삼덕포도원터_6>은 삼덕포도원 터의 현재 모습인데, 아파트가 들어선 현재는 어디에서도 과거 안성포도의 효시를 이루었던 포도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


안성읍 안법학교 천주교경당
안성읍 안법학교 천주교경당 사진 현재의 안법고등학교는 1909년 안성사람들의 기부와 천주교 서울교구의 도움을 받아 공베르(A. Gombert) 선생에 의해 설립된 사립공교안법학교(私立公敎安法學校)를 모태로 하고 있다. 처음 개교할 당시는 교사(校舍)를 마련하지 못해 당시의 안성성당 건물을 교실로 이용하였다. 애초에 안성성당은 지금의 안성시교육청 인근에 위치했던 한 민가를 교회로 사용하였는데, 위의 사진에 보이는 한옥건물이 바로 당시의 안성천주교경당이다. 안법학교 또한 1909년 개교한 시점부터 줄곧 이 경당(經堂)을 교실로 이용했기 때문에 사진에 보이는 건물이 안법 최초의 교사였던 셈이다.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이 사진의 촬영시점은 1930년대 초반, 현재의 안성성당 구관(구포동성당)이 신축된 이후로 추정된다. 앞줄에 너댓살 쯤 되어보이는 코흘리개 어린아이부터 뒷줄에 10대 후반쯤 되어보이는 다 큰 처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학생들이 7명의 교사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한 사진이다. 이들 교사(敎師) 가운데 중앙에 자리한 이가 안법학교의 설립자이자 당시 교장이었던 공베르 선생이다.


공교안법학교(公敎安法學校) 제1회 졸업생들
공교안법학교(公敎安法學校) 제1회 졸업생들 사진 1909년 프랑스 선교사 앙투안 공베르(Antonio Gombert, 1875-1950)에 의해 설립된 안법학교의 초창기 교사(校舍) 모습이다. 교명인 ‘안법’은 안성의 ‘안(安)’자와, 설립자의 모국인 프랑스 및 천주의 말씀 또는 하늘의 이법(理法)을 뜻하는 ‘법(法)’자를 결합한 것이다. 여기에는 천주의 사랑을 통해 사회정의와 민족정기를 실현할 안성의 인재를 양성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공교’는 카톨릭을 한어(漢語)로 번역한 것으로, 카톨릭 신부인 프랑스 인 공베르가 설립해서 붙은 이름이다. 사진은 1923년 제1회 졸업생들과 당시 3,4학년에 재학중인 학생들이 안성공원에 모여 졸업을 기념하기 위해 촬영한 사진이다.
1909년 개교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들어서 처음으로 졸업생을 배출하게 된 이유는, 초기 10여 년 동안은 교과과정이 확정되지 못해 졸업생들을 배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낙원동에 위치하여 낙원공원’이라고도 부르는 안성공원은 봄에는 앵무꽃이 화사하고[春櫻花], 여름에는 나무그늘이 장관이며[夏綠陰], 가을에는 연꽃이 만개하고[秋蓮花], 겨울에는 공원을 감싼 하얀 눈이 청취를 돋운[冬積雪] 탓에, 예로부터 널리 안성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곳이다. 지금은 도시화에 밀려 그 면적도 크게 왜소해졌지만 과거에는 주변에 주택들도 별로 많지 않아서 안성외곽에 자리한 휴식의 명소로 인식되었다.

사진의 왼쪽에 보이는 정자는 동일정(東一亭)이다. 왼쪽 사진은 같은 장소를 촬영한 최근의 사진이다. 옛 사진을 보면 공원 뒤편으로 건물은 거의 없고 대신 경작지가 자리하고 있지만 현재는 명륜여자중학교(1946년 설립)와 삼보아파트를 비롯한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서 번화한 시가를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공베르와 김태영
공베르와 김태영 사진 지난 세기 안성의 근대문화사, 특히 사회교육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발자취를 남긴 앙투안 공베르 선생(오른쪽)과 김태영 선생(왼쪽).

20년 터울을 둔 두 분은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며 근대 안성의 교육 사회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스스로 “청도후인”(淸道后人)이라고 칭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김태영 선생은 경북 청도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보성학교를 졸업한 후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봄 안성에 정착하였다. 선생은 동아일보 안성 주재 기자로 재직하면서 활발한 사회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안성공립보통학교(현, 안성초등학교)와 공교안법학교(현, 안법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공베르를 교장을 도와 안성의 미래를 책임질 세대의 교육에 힘썼다. 또한 안성청년회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활발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공베르 신부의 교육사업은 김태영 선생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한 일이었으며, 동아일보 교육공로상을 공베르 신부가 수상하도록 천거한 것도 바로 선생이었다.


안법학교와 여성교육
안법학교와 여성교육 사진 1920년대 후반 공교안법보통학교(公敎安法普通學校)에 재학했던 여학생들의 모습이다.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지만, 안성에서도 신교육이 시행된 초창기에는 여성들의 교육은 상대적으로 취약했다. 안성지역에서는 일찍이 1902년 개교한 안성소학교(현, 안성초등학교)를 비롯, 공교안법학교(현, 안법고등학교), 해성학교(1930년대 폐교) 등 191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여러 신식학교들이 문을 열었으나, 1912년 이전까지만 해도 하나같이 여학생의 입학은 허용되지 않았다.

당시 학교 관계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법학교는 1912년 공베르 교장과 몇몇 뜻 있는 인사들의 설득으로 안성에서 최초로 여생도(당시 여학생들을 지칭한 명칭)들을 받아들여 여성교육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으며 지역 교육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오늘날 교과과정에 비추면 초등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당시의 보통학교에 입학한 여학생 중에는 결혼해 자식까지 둔 사람도 있었다고 하니, 얼마나 배움에 목말라 있었는지 어렵지 않게 헤아릴 수 있다. 사진에 보이는 앳된 여학생들은 대부분 작고하였을 것이나 현재 생존해 있다고 한다면 모두 구순(九旬)에 가까운 노령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사진:1929년 입학식_1>은 신입생으로 입학하는 새내기 여생도들의 모습이고, <사진:졸업식_2>는 졸업식 기념사진인데 중앙에 공베르 교장의 모습도 보인다.

<동아일보> 지상(1927년 6월 17일자) 에도 소개되었던 것처럼 “순 조선식으로 가르쳤던” 안법학교는 우리 민족의 결연한 독립의지를 만방에 과시한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통치로 돌아선 일제가 교육정책을 수정하여 ‘신교육령’을 공포 시행함으로 인해 크게 타격을 받아 학교의 존폐마저 불투명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안성의 교육에 크게 기여해온 안법학교가 문을 닫아서는 안된다는 결연한 의지를 지녔던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과 천주교인들, 그리고 김태영 선생 등 당시 안법학교 교사들의 노력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공베르의 이임
공베르의 이임 사진 앙투안 공베르는 1900년 안성에 정착한 이래 1932년 안성을 떠날 때까지 수차에 걸쳐 고국인 프랑스를 방문하였는데, 갈 때마다 그는 프랑스 남부의 유서깊은 포도산지들에 들러서 한국에서 잘 자랄 수 있는 포도나무 종자를 구해왔다.

이렇게 가져온 묘목이나 씨앗을 처음에는 안성성당의 마당에, 나중에는 성당 부속 토지에 제법 규모를 갖추어 재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유명한 삼덕포도원이 되었다. <사진:삼덕포도원_3>의 화살표 부분이 당시의 삼덕포도원 자리인데 개발에 밀려 현재는 이곳에 동신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공베르는 단순히 포도를 재배만 한 것이 아니라, 이를 포도주로 만들어 자신이 집전한 전례(典禮)와 미사에서도 직접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병 해충에 취약하다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열매로 포도주로 만들었을 때 색이 붉고 진하며 향기도 그윽한 뮈스카(muscat)나 뮈스카 드 앙브르(muscat de hambourg)같은 품종들을 주로 들여왔으며, 동생인 쥘리앙이 안성을 찾아왔을 때 손수 만든 포도주를 대접했다는 일기의 기록, 그리고 현재 프랑스에서 포도주 제조업에 종사하고 있는 후손들의 증언 등을 종합할 때 공베르 신부가 안성에서 포도를 재배한 주된 이유가 포도주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사진:공베르 신부_1>은 1920년대 안성성당 앞 뜰에서 자신이 기른 포도 한 송이를 손에 들고 포즈를 취한 공베르 신부의 모습이며, <사진:안성에서 생산된 포도_2>는 현재 안성에서 생산된 포도의 사진이다. <사진:공안국 귀국_3>는 수차에 걸친 고국 방문 중 1926년의 방문 후 선편으로 부산에 도착한 후 기차를 이용하여 안성역에 도착한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삼덕포도원터_6>은 삼덕포도원 터의 현재 모습인데, 아파트가 들어선 현재는 어디에서도 과거 안성포도의 효시를 이루었던 포도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서 안타깝다.


노년의 앙투안 공베르
노년의 앙투안 공베르 사진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에 달한 앙투안 공베르의 노년 모습으로, 안성을 떠나 서울에서 사목활동을 수행하던 1940년대 중반 무렵 촬영된 사진이다.

이 무렵 공베르는 용산신학교 등지에서 한국의 젊은 사제 지망생들의 교육에 헌신했는데, 젊은 신학생들 중에는 김수환 추기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다. 이 사진을 촬영한 지 몇 년 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안성포도의 전래자인 앙투안 공베르는 동생 쥘리앙 공베르와 함께 북한인민군에 체포되어 이른바 ‘죽음의 행진’ 끝에 평안북도 중강진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앙투안은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오랜 지병의 악화로 11월 12일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다음날 동생 쥘리앙도 형을 따라 평생 간구했던 천주의 품에 영원히 귀의했다.

이 땅의 50년 삶을 그렇게 마감한 프랑스 신부 앙투안 공베르. 그의 육신은 차가운 북녘 땅에 묻혀 한줌 흙이 되었으나, 그가 근대의 안성에 남겨준 값진 유산인 명품 포도와 천주교 신앙은 아직도 안성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똬리를 튼 채 살아 숨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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